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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읽는 미술 이야기
마르셀 뒤샹(1887-1968):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본문
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1950,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재조명을 받으며 현대 예술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활동 초기서부터 논란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미술계에서 환대와 멸시를 동시에 받았던 그였지만 20세기 중반에 오면서 그는 현대예술의 선구자로 등장했다.

오늘날 전개되는 예술은 많은 부분을 뒤샹의 작업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의 작업을 외면하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운게 사실이다. 뒤샹은 당시까지 형성되고 전개된 예술, 즉 전통적인 매체와 기술, 기성 관념으로부터 벗어난 예술을 시도했고 추구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보에는 기존 예술계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토대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그 당시 모더니즘 예술의 한 조류로 이해되던 입체주의(Cubism)가 그 대상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1912년에 완성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912년 그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를 파리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본 앙데팡당전 전시위원회의 반응은 냉담했고, 당시 작품의 진열을 담당했던 입체주의 이론가이자 화가였던 이에 의해서 철수를 권고받게 된다. 철수 권고의 이유는 그의 작품이 입체주의 회화와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된 움직임이 '미래주의'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누드는 결코 계단을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사실 뒤샹의 관심은 입체주의에 있었고 그 관심을 토대로 작업을 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와 미래주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그림은 1912년 1월 베른 하임 준 화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첫 전람회가 열렸던 무렵에 그린 것이지만 이미 1911년에 이 작품의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그리게 된 동기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동력주의를 암시하는 관심이나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이 시사하는 것보다는,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형태분해에 대한 관심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 회화를 통해 시네마같은 결과를 나타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다."
선언문의 시대이기도 했던 20세기 초의 예술계는 본인들의 '-주의(ism)'만이 예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성기 모더니즘은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배타적 예술관이었으며 그것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C. Greenberg)에게까지 이어지는 정신이기도 했다. 당시 뒤샹은 전위적인 예술가들에게서 아카데믹한 예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미학적인 편견 그로 인한 배타적인 폭력적 태도를 보았고 이에 실망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13년 미국 아모리 쇼(The Armory Show)에 등장하게 되는데, 파리에서와는 다르게 뒤샹의 이름을 미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는 작품이 된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누구는 악마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선구적인 명작이라고 말하지만 어떻든 이 누드 작품으로 뒤샹은 미국 미술계에서 명성을 얻게된다. 그리고 아모리 쇼를 통해 그는 미국에서 주요 후원자이자 컬렉터를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이 나로 하여금 개인적인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난 내 자신에게 '자, 이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어떤 그룹에도 낄 이유가 없군. 내 스스로에게만 의지하고 혼자가 되는거야'.라고 말했다."
"회화의 물리적인 면을 초월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어떤 개념도 배운 적이 없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낼 수 있겠어?"
1912년 뒤샹이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콘스탄틴 브랑쿠시(C.Brancusi)와 함께 항공 공학 박람회에 가서 프로펠러를 예찬했던 말은 앞으로의 그의 예술적 행보를 예고한 듯 보인다. 이후 그는 최초의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여겨지는 <자전거 바퀴>를 1913년에 탄생시킨다. (개념적으로 <자전거 바퀴>가 레디메이드가 된 것은 1916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뒤샹의 예술세계를 조명해보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레디메이드'일 것이다.
기성품을 뜻하는 레디메이드는 기존의 예술적 창조 관념을 전복시키는 미학적 실천에 다름아닌 전통파괴적인 미학적 개념이며 실천이고 사물이었다. 뒤샹이 선보인 레디메이드 단 하나로부터 갖가지 새로운 미학적 관념과 실천들이 파생되었는데, 우선 살펴볼 수 있는 전복적인 미학적 관념은 전통적으로 존속해왔던 수공예적 노동자로서의 창작자의 소멸일 것이다. 즉 예술작품의 근원적 존재로 존재해왔던 물리적 주체로서의 예술가 관념의 파기였다.
레디메이드의 등장으로 인해 예술가가 더 이상 직접적인 물리적 가공을 통한 물질적 생산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와 상황이 펼쳐졌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기성품에는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손길이 누락되어 있다. 예술가는 누군가에 의해 미리 생산된 사물을 선택하고 그것의 실용적 맥락에 개입하여 전혀 다른 맥락에 그것을 위치시키는 일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실천은 오브제로 사용된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만들고 그것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끔 만듦과 동시에 사물의 의미 자체를 새롭게 하는 일이었다. 전통적인 미(美)개념과도 단절된 레디메이드는 그 사실로 인해 새로운 미개념을 제시하는 오브제가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내재된 정신은 화석화된 전통적인 예술 자체에 도전하는 정신, 즉 부정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 기성 예술과의 단절은 레디메이드의 개념적 토대를 구성하는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이걸(레디메이드) 낭만적으로나 인상주의적으로나 입체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거라.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레디메이드는 상당히 단순화되고 간소화된 작가적 실천이지만 그 이면에는 단순하지 않은 사유가 토대로 작용했다.
"동물적인 표현보다는 지성적인 표현으로. 이것이 예술이 가야 할 방향이다."
레디메이드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전복적인 미학적 관념은 예술작품이란 한 예술가에 의해 제작된 원작(original)만이 존재한다는 유일무이성, 그 원본성에 관한 관념과 실재를 파기했다는 사실이다. 산업사회에서의 산업적 물질은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었다. 이미 그것은 대량생산된 생산품으로, 구매한 물건이 고장이 나거나 망가진다면 다시 매장에 가서 똑같은 물건을 사면 그만이었다. 무엇이든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현대산업사회의 객관적 사실 중 하나였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산업적 물질을 뒤샹은 예술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샘>이나 <자전거 바퀴>, <병 걸이>, <부러진 팔에 앞서서>와 같은 레디메이드는 1910년대에 등장했지만 상실된 이후 1960년대에 다시 똑같은 물건으로 등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뒤샹의 미학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된 물질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아이디어로서의 예술작품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사용한 것은 미학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였다."
수공예적 노동자로서의 창작자를 소멸시키고 원본성을 파기한 레디메이드 미학은 1960년대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witt)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에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일반 사무원처럼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실제 작업에 관한 아이디어를 문서화하고 기술자들에게 실제적인 작업의 모든 권한을 넘긴 솔 르윗의 개념미술은 레디메이드 미학의 연장선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생산된 제품을 예술재료로 사용하는 레디메이드 미학은 미니멀리즘(minimalism),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등의 예술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학적 실천이기도 했다. 이렇듯 현대예술에서 레디메이드 미학의 영향을 살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마르셀 뒤샹이 현대예술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데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레디메이드의 등장으로 이전에는 예술로 간주되지 않았던 재료와 대상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옴으로써 예술 개념이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예술재료로 이해되지 않았던 산업적 산물이 이제는 예술재료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캔버스와 유화물감, 대리석과 청동 등을 가지고 본인의 개인 작업실에서 고뇌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손수 제작한 무엇만을 예술로 이해하는 낭만주의적인 예술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미니멀리스트인 댄 플래빈(Dan Flavin)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직관력에 의지하는 신경질적 '외톨이들'에 의해 지저분한 스튜디오에서 행해지는 노동에 대한 지난날의 소중하고 경건한 사랑의 감정은 이제 지나갔다."
"나는 새로운 미술의 개념들을 강조해야하는 미술학교가 학교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작업하는 것만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미술이 기술이라는 관념, 즉 작업대와 제도용 책상에서 작업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요셉 보이스
이와 같은 정신적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게 예술이야? 라는 식의 현대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어찌보면 이미 내부적으로 고착화된 예술 관념의 자기 방어적 반응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술이 ‘형성된 역사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뒤샹 이래로 전개된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입구에는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여러 계기들의 짜임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그것을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 예배적인 형상물들 따위가 지난 날에는 예술이 아니었는데 역사를 통해 예술로 변한다. 또 지난 날에는 예술이었던 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예술이 아니다. ... 예술이 형성된 존재라는 점으로 인해 예술의 개념은 예술이 지니고 있지 않은 요인들을 드러내게 된다." - 아도르노
"나는 단순한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아이디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 마르셀 뒤샹
-참고 도서
재니스 밍크, 『마르셀 뒤샹』, 정진아 옮김 (마로니에 북스, 2006)
토니 고드프리, 『개념미술』, 전혜숙 옮김 (한길아트, 2002)
김광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1997)
Th. W.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7)
김정아, 「존 발데사리의 포스트 스튜디오 미술 연구: 미디어 이미지 차용 전략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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