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예술의 종말
- 미술
- 학고재갤러리
- 임마누엘칸트
- T50 Casual
- 아서단토
- 런던스쿨
- 철학
- 합격 후기
- 국제갤러리
- 동시대예술
- 페터뷔르거
- 신라이프치히화파
- 환기미술관
- 현대미술
- 기술복제시대의예술작품
- 이상의이상
- 빌비올라
- gtq 1급 포토샵
- 저자의죽음
- 추상회화
- 대형점화
- 이것은파이프가아니다
- 예술
- 미학
- 바실리칸딘스키
- 사진
- 현대카드스토리지
- 팀아이텔
- 아방가드르의이론
- Today
- Total
짧게 읽는 미술 이야기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 아서 단토 본문
오늘날의 예술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떤 어려움에 쉬이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당혹스러움을, 때로는 진기함을, 때로는 몰이해의 상태에 빠져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감상자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것이 오늘날의 예술인 것이다.
미국의 20세기 저명한 미술비평가인 아서 단토(Arthur Danto, 1924 - 2013) 또한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했다.
"나는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만 도무지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 오브제를 한두 번 대면했던 게 아니다."
단토의 말처럼 동시대 예술은 어렵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과 같다. 대개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이해와 하나가 되길 바라는 깊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예술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길 바라면서 이해하기를 추구한다. 이와 관련해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에 그 뿌리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력을 발휘하는 데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로써 이를 설명할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그렇다면 예술은 그것과 마주함과 동시에 쉽게 이해되어야만 하는 무엇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작업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이해력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무엇과 대면하면서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배제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 예술은 우리가 가진 이해 영역 안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모습들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내용은 다양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예술에 대한 우리의 낡은 고정관념의 영향을 한 번 반성해 볼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여전히 예술을 이해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관념이 자연재현적인 예술에 그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 말이다.
"이런 순수미술은 '난해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난해함의 가장 큰 원인은 순수미술이 미술 자체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회화나 조각이 우리가 평상시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유사한 재현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생각, 이것이 미술에 대한 직관적 이해다. 이 생각은 현대미술 이전에 서양미술의 긴 역사를 지배해 온 미술, 그것이 현세든 내세든, 인간이든 신이든, 어쨌거나 항상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었던 미술의 전통이 뒷받침한다." - 조주연
오늘날과 시간적으로 먼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미 지난 전통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통이 전통이라는 이유 하나로 폭력적일 때가 있다. 오늘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그 기준이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방식이라면 그것은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상을 단토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동시대 예술의 한 가지 특징인 "양식적 통일성의 결여"로서의 결과이다.
"... 역사의 짐에서 해방된 예술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혹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컨템퍼러리 미술의 징표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에 비해서는 큰 놀라움도 아닌 것이, 컨템퍼러리 양식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동시대 예술의 양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술에서 양식이라 함은 곧 스타일(style)을 이야기하는데, 동시대 예술에서는 당대의 예술을 정의내리고 이해할 수 있는 통일적인 스타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예술사에서 양식이 갖는 기능이라 함은 다양한 시대의 예술을 분류화하고 예술 경향을 도출하여 하나의 판단 기준으로 당대를 정리하여 규범화된 예술적 식별능력을 갖추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처럼 말이다. 하지만 단토는 오늘날의 예술에서는 이와 같은 식별능력을 갖출 통일적인 양식적 규정이 어렵다고 본다. 예술이 종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모던 예술은,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그 수효가 많았던 경쟁적인 운동들 속에서 표출되었으며, 이 운동들 각각은 자기 자신의 용어로 예술을 정의하고자 했다. ... 어떤 점에서 예술의 종말은 운동들의 종말과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라는 테제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이 말이 예술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반복적으로 언급하지만 예술의 종말이란 곧 역사의 종말, 즉 어떤 예술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전개과정상 다음 단계로 여겨지는 예술로 등장한다는 어떤 이야기(narrative)의 종말을 말한다. 오늘날 예술이 취해야 할 어떤 역사적 방향이란 없다. 예술이 취해야만 하는 어떤 특정한 목적 또한 없다. 예술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관념은 오늘날 폐기된다. 오늘날의 예술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단토에게 동시대 예술의 모습은 자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단토의 이러한 견해에는 기본적으로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녹아들어 있다. 특히 미국의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상징인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 Greenberg)의 "극단적인 불관용"스러운 예술 개념에 대한 비판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미국의 추상미술이 국제적인 운동이 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그린버그의 견해 중 중점적인 것은 회화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추상적 양식으로의 발전은 그 역사 발전의 진보적인 결과이며 미술이 자신의 매체적 순수성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일은 역사적인 일이라는 데 있다.
"모더니즘의 역사가 끝나게 된 것은 형태, 표면, 물감 등과 같이 회화를 그 순수성 속에서 정의내려 주는 것들에만 관심을 쏟은 모더니즘이 너무 국지적이고 너무 물질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가 정의내리고 있듯이, 모더니즘 회화는 "나는 가지고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미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만 물어볼 수 있었다."
당시의 예술의 모습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였으며 그 이후 진행된 추상회화의 다른 양상(탈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이 곧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린버그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단토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 상자>(1964)의 등장 이래로 예술의 종말 테제를 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 모더니즘 예술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술의 등장으로 모더니즘은 종말을, 역사는 종말을, 예술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견해에 따라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가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오늘날, 그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가 가능하게 된 시대가 오늘인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을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예술 작품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해석"을 통해 예술 작품은 일반 사물과 구별이 된다.
"예술가들이 이렇게 실제 사물(ex. 브릴로 상자)과 아주 똑같은 사물을 생산하게 됨에 따라 이 사물을 어떻게 하면 리얼리티 속으로 단순히 붕괴되어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된다는 점이 분명해졌던 것이다. 이 물음의 해결책에 이르는 하나의 조그마한 발걸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린버그가 말하고 있는 바대로 리얼리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와는 정반대되게 예술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테제는 하나의 견해로, 하나의 양식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하나의 선언문으로 예술을 정의내릴 수 없다는 데 무게를 둔다. 그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오늘을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대"로 이해한다.
단토의 현시대에 대한 이와 같은 진단은 유효한 듯 보이며 현대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어떤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예술이 아닌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마치 빛을 이야기하려면 어둠이 필요한 것처럼.
"예술은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 아도르노
"예술작품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선천적인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 아서 단토
-참고 도서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상섭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5)
조주연, 『현대미술 강의(순수미술의 탄생과 죽음)』 (글항아리, 2017)
Th. W.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7)
'짧게 읽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팝 아트(feat. 신아방가르드): "대중적인 이미지는 결코 주제가 아니다." - 제임스 로젠퀴스트 (2) | 2024.02.04 |
---|---|
페터 뷔르거(1936-2017): "예술의 자율성은 시민사회의 카테고리다" (2) | 2024.01.19 |
"유사와 확언의 낡은 등가성"을 추방시킨 칸딘스키: 푸코와 칸딘스키 (2) | 2024.01.14 |
롤랑 바르트(1915-1980): 저자의 죽음 (4) | 2024.01.04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 발터 벤야민 (4) | 2024.01.02 |